향내음의 보금자리/일주문(심검당)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100일 기도를 마치며.....)

향내음(蕙巖) 2012. 11. 26. 12:42

 

 

지난 여름은 굉장히 더웠는데,
벌써 겨울 기운에 차가움을 느끼게 하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때가 되면 계절의 변화 속에 
이렇게 계절은 끝없이 순환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백일동안 기도하느라 애를 많이 썼지만,
오늘 백일 회향을 맞이하여 지난 백일을 한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축하는 의미로 서두없는 글을 남깁니다)

백일동안 기도를 한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과의 약속 이전에 자신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 큰 능력과 자신감이 생겨
모든 소원을 성취 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그래서 백일동안 기도를 잘하게 되면, 부처님과 만물과
나와 하나가 되어 한량없는 공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뜻으로 여기에 관한 시를 읊어보겠습니다.


    나의 가족
“방편은 어머니요 지혜는 아버지니
시방세계 부처님이 여기에서 나시었네.
자비심은 딸이 되고 정직함은 아들이며“
용맹심은 친구 되고 온화함은 이웃이며
정진력은 수레되고 원력심은 목적되어
날마다 보살행을 끊임없이 실천하네.
남을 위해 나를 쓰니 모든 일이 불사되고
나를 위해 나 잊으니 일체법이 참되도다.
깨끗하고 지혜로운 둥근 마음이여!
사심 없는 고요한 맘 부처 마음 현전 일세.

이 시 앞부분은 유마경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따옴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유마거사에게 부처님 제자가 질문을 했어요.
“거사님의 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니까
“ 지혜는 아버지요, 방편은 어머니며
자비심은 딸이고 정직함은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어린 시절 유마거사의 이러한 법문을 보면서
어쩌면 비유가 이렇게 절묘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우리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너무 가정에 국한해서 생각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온갖 인간적 고뇌가 생겨나는 것인 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한계를 좀 더 넓게 생각해야 되요.
잘못된 가족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체만물이 다 나의 가족이 됩니다.

일체만물이 가족이 된다는 이면에는 모든 만법은
뿌리가 하나라는 철학이 있기 때문 입니다.
일체만물이 나의 뿌리요, 나의 부모이며 나의 형제 아님이 없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이요 불교에서 보는 가족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모든 만물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봅니다.
다시 냉정하게 말 한다면 부모 형제간 뿐 만 아니라 나도 내가 아니므로
이 세상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한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와 남이라는 두 가지 차별된 생각으로 보는 것은
모두 전도된 시각이며 여기에 따라 일으키는 모든 분별망상 또한
근원적으로 잘못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이치에서 보면 일체만물의 뿌리는 하나라고 보죠.
이렇게 만 가지 사물들이 본체가 하나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절대평등이라는 정신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세계 일화라고 합니다, 온 우주 법계가 한 송이의 꽃이라는 말 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부처님이 처음 설 하셨고 그 이후 인도에 있는
힌두교와 수피즘이 불교에서 도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물 동근(同根)이라는 철학은 불교의 근본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이고 근간이 됩니다.
여기에는 국가도 초월하고, 가족도 초월하고, 민족도 초월하고, 자신도 초월하고,
인간과 짐승과 미물, 곤충, 유정 무정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초월할 적에 나고 죽음이라는 한계점에 벗어나게 되요.
우리가 나고 죽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본에서 이탈 되서 나왔기 때문에
생, 사라는 환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환이란 본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착각과 무명에 의해 일어났으므로 실제성이 없고 실제성이 없는데
집착하므로 끝 없는 환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리는 자아라는 한계에서 벗어난 존재인데,
무지로 인해 인간들은 많은 고뇌와 불행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만일 진정한 자기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이루고자 한다면
빨리 자신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영원 생명 영원한 존재 이것이 우리들의 본래 참 모습인데,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고 망념에 이끌리다 보니 생사에
속박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영원성을 바로 보지 못하므로 한없이 윤회계에 돌아다니면서
무한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고뇌와 부질없는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의 갈등과 여자들의 갈등은 극명하게 차이가 나요.
여자들의 갈등은 사소한 어떤 말, 감정, 자존심으로 인해서
사소한 갈등이 무진장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람마다
엄청난 세계가 벌어지고, 엄청난 망상의 경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을 어떻게 소멸할 것인가? 하는데서는 길은 같습니다.
남자들의 갈등은 여자들보다 선이 굵고 거칠어요. 그리고 아주 잔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의 갈등은 섬세한 면이 많다 보니 미세한 현상에서도 충격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고뇌도 많고 망상도 많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현상들을 보면서
참으로 고뇌로부터 해탈의 길을 이뤄내기는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결국은 부족한 생각에서 일어나므로
우리는 완전한 삶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다 나름대로 존재하는 방식이고 원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데 그것을 굳이 끌어내어 시끄럽게 하는 게 인간 들입니다.
어찌해서 그런가요.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분별망상 때문에 세상의 온갖 시비가 일어나게 됩니다.
시비는 말로써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 이므로
우리는 절제된 언어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여러 사람과 관계에서
언어를 절제한다면 그만큼 품격이 높아지고 삶이 안락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자신을 잘 살펴 부질없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아야하고
모든 현상을 잘 생각하고 반성하는 속에서 우리는 참된 삶을 살아 갈 수 있고,
모든 갈등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사라는 거대한 업력을
얼마만큼 잘 다스려 거기에 휘말리지 아니하고 자기를 잘 극복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영웅호걸이라도 생사를 면하지 못하므로 뛰어난 대장부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대장부는 생사를 초월할 때 출격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한때 세상을 흔들었지만,
그들은 지금은 지옥에 가 있거나, 축생에 떨어져 있거나,
혹은 인간으로 태어나도 빈천한 과보를 받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권불 십년이라 했는데 요즈음은 권불 오년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하다가 오년 후에는 감옥소 들어가기도 하고, 바위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지금의 권력은 하야 후에 어떤 비참한 모습이 될 것이라 모두 이야기 합니다.
아마 불자라면 99.9는 불량이라고 볼 것입니다.
과연 대통령을 내놓고 무사 할 것인가를 걱정 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밖으로 나타나는 허명과 욕심 때문에
가지가지 어리석은 짓을 많이 지었기 때문 입니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국민들의 삶의 질을 생각해야 하는데
거기서 사욕을 부리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욕이 인간의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좀 더 초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갑자기 기고만장이 되어 성인이 아니고는 덕치를 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오해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이나 문제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불이익이 발생 된다 해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여유 있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급하게 대하거나 해명하려고 한다면
전생의 업장도 소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업력이 소멸 될 때까지는 오해를 받더라도 가만히 기다려 줄 때
업이 빨리 녹아요. 그런데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고 성급해지면
점점 업이 소멸되는 시간이 길어져 한번 모함을 당하고 끝날 일을
세 번, 네 번씩 끌고 가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도인에게 가까운 신도 딸이 임신을 했는데,
딸의 부모님이 계속 추궁을 하니까, 야단맞는 것이 두려워서,
부모님이 평상시 존경하는 큰스님과 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화가 나서, 큰 스님한테 가서 갖은 행페를 부렸지만
큰스님은 아무런 변명도 안하고 “그런가?” 한마디로 끝냈어요.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내가 했느니, 안했느니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절에도 못 가게하면서 난리를 치니까, 큰 스님을 욕보이는 것 같아서,
딸이 할 수 없이 옆집에 사는 총각이라고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에 딸의 부모는 너무 죄송스러워 큰스님께 찾아가 무례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사죄를 하니까, “그런가?” 하고 한마디로 끝내고
아무 표정하나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이에 거기 있던 신도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큰 스님을 공경하고 불법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온갖 모욕을 당하더라도 변명을 하지 말고,
온갖 칭찬을 들을 적에도 우쭐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마음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못을 하면, 비난을 받습니다.
그것은 변명하거나 해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여자들은 정치적인 행위에서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남자들은 사회를 경영하기 위해서 정치한다면 여자들은 친구들과 관계에서
시기질투가 생기면, 죄도 없는데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모함을 합니다.
뒤에 탄로가 날 것 같으면 감추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끝도 없이 일어납니다. 이게 중생 세계 현실입니다.
불자들은 인과를 알고 바르게 사는 길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현실에서 좋고 나쁜 문제에 좀 더 초연하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초월하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시비 될 것이 없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반성해서 고쳐야 하고, 허물이 없는데 남이 나를 비난 했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 해결이 됩니다.
억울한 것 같아도 억울할 것 없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을 다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여유 있게 살아야 됩니다.
좋은 말을 들었다 해서 너무 기뻐하다가, 그 사람 불량하다는 말 한마디에
인생을 자포 자기 할 정도로 비극에 빠진다면,
어찌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보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불교는 일체를 초월하는 길입니다.
때문에 나와 남이라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데,
남이 나를 비난한다면 그게 곧 내가 나를 비난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남을 칭찬한다면, 곧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이 되고,
내가 남을 비방한다면, 곧 내가 내 자신을 비방하는 것이 되겠지요.

지금까지 되는 대로만 살아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앞으로도 행여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라도 내 삶의 방향키를 쥐고
전 생애를 건 먼 항해길을 다시
힘차게 나서야겠습니다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매일 주어지는 우리의 삶이
후회가 없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이 될까요?
내가 가는곳, 내발길이 머무는 곳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삶
나보다 남을 배려하며
기쁨과 행복을 서로 나누어 가는 아름다운 삶
이러한 삶이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고 멋진 인생으로 만들어져 갈것입니다

밝은 미소가 가득한 행복한 한주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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