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내음의 보금자리/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을미년 동지에 즈음하여....

향내음(蕙巖) 2015. 12. 22. 15:50

을미동지중후난(乙未冬至中候暖)
음장양출회원기(陰藏陽出回元氣)
방지자연무거주(放之自然無去住)
임성합도불혼침(任性合道不昏沈)

을미년 동지는 중동지라 기후가 따뜻하다
음의 기운은 감춰지고 양의 기운이 나오니
원기가 회복되는 것이다

놓아버리면 자연이라
가거나 머물음에 걸림이 없고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져서
어리석음에 빠기지 않는다.

동지는 태양이 동경 270도 위치에 있을 때이고,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때이지요.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고, 다음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습니다.

옛사람들이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 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역경의 복괘(復卦)를 11월, 즉 자월(子月)이라 해서 동짓달부터 시작한 것도 동지와 부활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짓날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예(宴禮)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해서 민간에서는 ‘작은 설’이라 하여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 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양속(良俗)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팥의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팥을 우물에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였으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들은 모두가 인간생명에 원기(元氣)를 불어 넣어 삶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하기 위한 방법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기(氣)는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물질적인 시원(始原)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기(氣)이므로 원기(元氣)라고도 하는데, 이 우주의 모든 공간에 꽉 차 있는 기체(氣體)로 생각되어 진 것입니다.

원기(元氣)에는 음(陰)과 양(陽) 두 종류의 기(氣)가 있지만, 근원의 기(氣)는 하나라고 봄으로 ‘일기(一氣)’ 또는 ‘일원기(一元氣)’라고도 지칭하지만 그냥 원기(元氣)라는 말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 원기(元氣)에서 음기(陰氣), 양기(陽氣)가 나와 ‘숨고 드러나고’를 반복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결합방식에 따라 우주 만물을 형성하는 다섯 개의 원기(元氣)가 만들어집니다. 즉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五行)이 생기는데 이를 질(質), 물질(物質)할 때 바로 그 질(質)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음양의 기(氣) 및 오행(五行)의 질(質)은 순회하여 움직이며 혼합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얽혀서 결합함으로써 만물을 발생시킨다고 합니다.

물(物)의 종류가 여럿 다름은 음양, 오행의 조합(組合)이 서로 다름에 따라서 그런 것이고, 그리고 또 동일한 종류중의 개별 차이가 나는 것도 낱낱의 ‘물(物)’을 구성하는 기질(氣質)의 맑고 탁하고, 두텁고 얇고, 면밀하고 거칠고, 등의 다름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의해서 완성된 이기철학(理氣哲學)에 있어서의 기(氣)의 기본 개념입니다.

나는 요 며칠 동안에 언론에 나오는 두 가지 뉴스에서 커다란 충격과 함께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서울대생의 자살을 통해서 나온 그의 유서, “생존은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前頭葉)의 색깔, 즉 염색체(染色體)가 아니라 수저(手箸) 탓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건이고, 또 하나는 11세 소녀에게 대여섯 살의 어린 아이의 몸무게에 불과한 16키로 그램까지 내려가도록 무려 2년간이나 굶기고 때리고 확대한 부모의 비정함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는 대통령 장학금까지 받아가면서 교육자인 부모 아래에서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두뇌 또한 상당히 뛰어났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 일들이 선망하는 서울대학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괜찮은 입지에 서있는 20세의 젊은 청년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경제적 상태에서 비롯된다.’라는 그런 위험한 불만을 토로하고 자살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무려 2년 동안이나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굶겨서 두드려 패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늑골마저 부러지도록 만든, 11살이 나이에 겨우 16키로 라는 그렇게까지 자기 자식을 만들면서도 동거녀와 오락게임에만 빠져서 살았다는 그 부모는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집지실도(執之失度) 필입사로(必入邪路)
방입자연(放入自然) 체무거주(體無去住)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설 것이며
집착을 놓아버리면 자연이라
본체(본성)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결론은 믿음이 없어서였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 집착입니다.
집착이 일어나면 마음이 법도(法度)를 잃고 분수를 잃어서
삿된 길에 빠지기가 십상입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면 자연(自然)이라
자연의 본체(본성)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습니다.

자살은 자기 집착이 아주 강한 사람이 선택하는 마지막 항변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머리로만 연산(演算)을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계산하고 불평하는 것이 모두 사회를 위해서거나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에 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유서에서, “저를 힘들게 만든 게 누구입니까. 이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나를 괴롭힌 그들을 위해서 죽지 못하다니요.”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자신를 힘들게 한 것은 모두 이 사회의 탓이고, 남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처럼 죽지도 않고, 자살하지도 않고,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진지하게 또는 진정성 있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남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나 형제 내지는 친지들, 소위 그의 죽음을 염려하고 걱정을 해 준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생각이나 논리는 합리적이고 옳지만 자기의 생각이나 논리에 어긋나는 사람은 전부 비합리적인 틀린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라는 말로 이 사회의 비합리를 비꼬면서 ‘자신은 합리적이었다.’ ‘옳다.’로 항변하면서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청년학생은 처음부터 자기 머리만 믿고, 자신의 논리만 맏고, 세상에 대한 믿음도 삶에 대한 믿음도 존재에 대한 어떤 믿음도 그런 형편없는 청년입니다. 자기 머리 외는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는, 아니 전혀 믿어 보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대도체관(大道體寬) 무이무난(無易無難)
소견호의(小見狐疑) 전급전지(轉急轉遲)

대도의 바탕은 크고 너그러워서
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다.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가지고
급하게만 서두르니 더디어지는 것이다.

대도는 우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입니다.
자성(自性)의 바탕이라는 말입니다.

존재의 본성(本性), 바탕은 크고 너그러워서
쉽거나 어렵다는 그런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믿는 마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머리는 머리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앎은 올바른 앎이 아닙니다.

성품에 바탕을 두지 않은 지식은 전부 허위 망상(妄想)일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은 마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마음은 중도(中道)를 잃고 있기 때문에
모두 분별망상인 것입니다.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식을 믿지 못하고
사회를 믿지 못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고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갈 곳은 죽음뿐입니다

아무 것도 믿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강한 자기 애착에만
빠져 있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살은 가장 자기애착이 강한 사람이 마지막 선택할 수 있는
자기기만(欺瞞)인 것입니다.

그는 어디에도 갈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자기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여우는 영리하지만 의심이 많은 짐승입니다.
여우는 의심 때문에 자신을 죽입니다.
가다가 돌아보고 가다가 돌아보고 하는 의심이
자신을 사냥되게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굶기고 두드려 패고 확대를 일삼아서 세상의 몰매를 맞고 있는 11세 소녀의 그 아버지 또한 이 세상의 무엇도 믿지 못하는 사람임에는 다름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그는 그의 그 불안한 감정을 자기의 어린 딸에게 해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불안에 자신이 확대되면서 그는 온라인 게임과 강아지만 가까이 한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만이 좋아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또 하나는 자신이 마음대로 확대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통하여 그 아버지는 자신이 불안함을 해소시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1세의 그 소녀는 달랐습니다. 그 소녀에게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에 믿음, 삶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대도(大道)의 본체입니다. 존재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에 깃든 자성(自性)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그 힘든 상황을 이기고 극복했으며, 그 험악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을 2층에서 배관을 타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훔친 과자봉지마저도 뜯을 수 있는 그 정도의 힘마저도 없어서 떨어뜨려야 했던 그런 상태의 몸으로 2층에서 배관을 타고 도망을 쳐서라도 살고자 했던 이 아이의 마음이 바로 믿음이 있는 마음이요. 믿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되는 힘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도(大道)인 것이며.
우주의 근본 바탕인 것이요.
이 우주 속에 충만한 원기(元氣),
즉 원기운(元氣運)인 것입니다.

음(陰)의 기운(氣運)이 감춰지면 양(陽)의 기운이 살아나고
양(陽)의 기운(氣運)이 쇠퇴하면 음(陰)의 기운이 살아나와
감춰지고 드러나면서 존재(存在)를 만들어갑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감춰지면 편안하고 행복함이 살아나고
편안하고 행복함이 쇠퇴하면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살아나와
길흉화복이 이렇게 서로 감춰지고 드러나면서
삶을 만들어 갑니다.

행복과 불행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고통과 안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동지는 이러한 우주원리가 작동되는 절기라는 믿음 갖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동지기도 동지불공은 이러한 우주원기를 회복하는
믿음을 세우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행사입니다.
바른 믿음이 대도의 바탕인 것이요.
근본성품(根本性品)의 바탕인 것이며, 모든 존재의 자성(自性)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