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1]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화택고해(火宅苦海)라. 번뇌(煩惱)의 불이 타고 있는 고생의 바다인지라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가운데는 자질구레해서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꼭 해야 될 여러 가지 의무적인 일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큰 일이 오늘 여러분들께서 공부하시고자 하는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우리가 깊이 느끼지 못할 때는 그냥 놓쳐 버리고, 또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만
깊이 생각하면 '인생의 참다운 뜻이 무엇인가?' 하는 그러한 본질적인 도리를 생각할 때는
오늘 이와 같이 참선 공부하는 일이 가장 큰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 보고 일대사(一大事)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 참선 공부하는 일이 바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무량 세 동안에 우리가 윤회(輪廻)도 많이 하고 그때그때 윤회 과정에서 가지가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날도 고생 중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볼 때는 꼭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생(苦生)이다.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 말씀에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모두가 다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그렁저렁 편안히 살다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 그대로, 고생을 고생 그대로, 바로 수용을 해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바 업장(業障)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고생 아니겠습니까.
어머님도 고생이고 본인도 고생입니다.
어머님의 태중에 10개월 동안이나 그렇게 숨어사는 그때도 굉장히 고생스럽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조금만 잘 못 먹어도 태아는 고생합니다.
낳을 때도 고생, 성장할 때도 고생, 병들어 아파서 고생, 늙어지면 힘이 없어 고생,
그러다 이제 결국은 죽습니다. 죽음도 고생입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라는 것이 그렇게 뚜렷하게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때 자기한테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런 인생 고해 가운데서 하고 많은 일들 가운데서 참선 공부 이것이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가장 큰 일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일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천지 우주의 법칙이며 도리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다 따라야 하고, 또 부처님 팔만사천의 법문이 다 그렇지만
우리가 법문을 듣고 아는 것에 그쳐 버리면 그것은 자기 보배가 온전히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배워가는 단계에 따라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먼저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경지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먼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다 알고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정직하신 분이며 인간과 천상과 우주의 스승이 바로 부처님인지라,
부처님 말씀을 일단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도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자기 힘이 못 됩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는 우리가 체계 있게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理解)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믿고 해석하여 아는 것에 그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바로 부처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들이 그냥 내 말 듣고서 믿고 아는 것으로 전부다'. 이러한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고 이치를 보다 깊이 생각해서 꼭 실천해서 나와 같은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자(聖者)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냥 세간적인 그렁저렁한 행복을 우리한테 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보다 깊게 보다 차원이 높게 인식을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간적인 세속적인 행복을 위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은 세속적인 행복을 결코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속적인 행복은
사실은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한 것과 허망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원래 진리는 모두가 하나이건만 우리 중생들이 일체 존재의 근본 성품을 모르고 그렁저렁
세간적인 편의(便宜)라든지 저속한 행복이라든지 그러한 것만을 바라기 쉽지만, 그러한
유루복(有漏福)을 떠난 참다운 생명 자체, 여러 가지 번뇌를 떠나고 인생고를 떠난 참다운
불멸의 행복, 다시 변동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보통 안락스러운 것이나 또는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이 아니고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열반락(涅槃樂)을 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열반락이라는 것을 대체로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만 이것은 변동이 없는, 생사가 없는 영생의
행복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열반락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 마음도 바꿔지고 우리 생리도 몸뚱이도 바꿔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흐리터분한 피가 맑은 피로 바꿔져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마음도 몸도 바꿔져야 그래야 앞서 말씀한 열반락, 즉 불멸(不滅)의 행복을 자기가
얻을 수가 있습니다.
아는 지식으로 해서는 모르는 것 보다는 낮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의 인생고(人生苦)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고(苦)가 역시 죽는 고통 아닙니까.
죽음의 두려움이 있는 한에는 아직 범부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완전히 떠나 버려야 그래야 성인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 버려야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앞에는 여러 가지 생활고(生活苦), 사회고(社會苦)가 있습니다.
가지가지의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러한 고난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가 여러 가지 업(業), 선업(善業)도 짓고 악업(惡業)도 지었습니다.
전생에 악업을 많이 지었으면 그 때는 인과필연(因果必然)으로 꼭 우리가 그에 상응한
고통을 받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서 초보적인 가르침이 이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겠습니까.
인과법(因果法)을 무시하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을 못 지었으면 복을 못 받습니다.
그러면 고(苦)밖에는 못 받습니다.
그러나 복을 지었으면 꼭 거기에 상응한 과보로 해서 안락(安樂)을 받습니다.
과거에 지어서 금생에 받고 또 금생에 지어서 앞으로 받는 것입니다.
설사 과거 전생에 숙명적(宿命的)으로 잘 못 지어서 금생에 고생을 받는다 하더라도 금생에
심기일전(心機一轉)해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을 하면 그냥 즉시에
우리 운명은 바꿔지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는 숙명론(宿命論)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불법은 절대로 숙명론이 아닙니다.과거에 지어서 현재에 받는 것은 우리가 인연(因緣)의 제한을 받지만 금생에 자기가 하기에 따라서는 하늘 아래서나 하늘 위에서나 가장 존귀한 부처도
될 수가 있습니다.
가장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인데 다른 것들은 문제시 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소중한 법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많이 듣고,
바르게 해석해서 바르게 알고, 알았으면 바로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 우리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아서 증명(證明)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바른 행이 있어야 참다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대 차원의 가르침, 신해행증(信解行證), 이것은 먼저 바르게 믿고 해석해서 이해하고 알고 행하고 그래서 증명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 세간적인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영생의 안락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영생의 안락은 열반락(涅槃樂)입니다.
번뇌가 다 가셔버린 참다운 행복 이것이 열반락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그러한 것도 좋고, 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차원이 높습니다.
설사 배가 고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번뇌를 녹여서 영생해탈의 열반의 길로 자기도 가고
남도 이끄는 이것이 무상대도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80평생 거러지 생활을 하셨지 않습니까.
옷이나 음식이나 또는 잘 사는 것이나 권속이 많은 것이나 지위가 높은 것이나 이러한 것에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 당신 몸소 그와 같이 평생 거러지 생활을 하셨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또 그 뒤를 따라가신 무수한 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쿼바디스 도미네'라는 영화를 보셨겠지요.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전도를 할 때입니다.
그 로마가 워낙 기독교에 대해서 박해가 심하므로 배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를 탈출했습니다.
로마를 밤에 탈출해서 새벽녘에 ‘아티안’ 가도인가 하는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해가 솟아오르는 아침의 서광(瑞光) 가운데 훤히 예수님이 보인단 말입니다.
그 서광 가운데서 예수가 뚜벅뚜벅 걸어오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가 너무나 진실하게 믿으니까 환상적인 착각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성자의 길이란 그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분신(分身)을 낼 수가 있습니다.
한 번 성자가 되면 삼매(三昧)의 힘으로 자기 분신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분신을 열 사람 천 사람 우주에 가득하게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것이 쿠오바디스 도미네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회심(回心)해서 그렇게 박해가 심한 로마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다가 순교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그렇게 숭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구할 때에 너무나 안락의자에 앉아서 구하는 식으로 그렇게 편하게 구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떠한 도인들이나 한 고비씩을 넘을 때는 자기 신명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확현정(大廓顯正)이라.
큰 대(大)자, 죽을 사(死)자, 크게 한 번 죽어야, 대확현정이라.
그래야 크게 이른바 부활적(復活的)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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