云何賊人 어떤 도적놈이
假我衣服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裨販如來 부처님을 팔아
造種種業 자꾸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人身難得 사람 몸 얻기 어렵고
佛法難逢 불법 만나기 어렵다.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딴 나라는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의 우주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불공(佛供)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 파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福)도 주고 하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命)도 받고 복(福)도 받아 가라" 하면서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목탁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르게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실정에서 목탁이 돈벌이에 이용 안 되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입니다.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허물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허물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여 못 고치면 더 큰 허물을 빚는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내가 전부터 자꾸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성경 한 권이며 지침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겁이 납니다.
장경각의 그 많은 경판은 엄청납니다. 저 많은 것을 보아서, 언제 어디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호호망망(浩浩茫茫)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經) 중에서 부처님 말씀의 근본이며, 가장 소중한 경은 화엄경과 법화경으로 이는 경(經) 중에서도 왕(王)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 면에서 더 깊고 넓다 합니다. 화엄경도 이것이 80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구나 모두가 어려운 한문인데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經)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 인데 약(略)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가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불공하는 데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광수공양(廣修供養)편입니다.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초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 중에는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도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法供養)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곱 가지의 법공양 중에서도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그 골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물자를 당신 앞에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들이고 하는 것보다도 잠시라도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에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몇 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단정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사를 할 때 밑천을 많이 들여서 이익이 적은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을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이냐 하면 누구든지 이익이 많은 장사를 하려 할 것입니다.
많은 물자를 올려놓고 불공을 하려면 그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익 중생 공양(利益衆生供養),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나마 도와주는 것은 큰 힘 안 들므로 밑천이 적게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 같으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만분의 일로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길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울어댈 때 식은 밥 한 덩이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 놓고 무수, 수천만 번 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이 크다" 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권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용돈을 타 쓰고 있는데 어떻게 불공할 수 있는가」 하고. 그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불공이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예를 들어 버스 속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 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닢 주는 것, 그것도 불공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남을 도와주는 것은 모두 불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 마음, 물질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대상입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서야 결국에는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회 때 3000배(拜)를 한 뒤 백련암에 올라와서 화두(話頭) 배워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 이렇게 말하면 처음에는 모두 눈이 둥그렇게 됩니다.
우린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맹이를 듣고 보면 그것이 아니고 남 도와주는 것이 참불공 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끝에 가서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예」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몸으로써, 마음으로써, 물질로써 좋은 불공을 해놓고 입으로 자랑하면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 선전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푼이나 기부해 주고 신문에 크게 선전해 달라고 하며 또 그 재미로 돈 쓰는 사람도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 장만하는 것이지!
아까운 돈으로 남 도와주고, 몸으로 남 도와주고, 마음으로 남 도와 주고서 왜 입으로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까?
참으로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말 안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 생각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남 모르게 남 도와주라」 이것입니다.
「남 모르게 남을 도울 것!」
예수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손이 모르게 하라」 기막힌 소리 아닙니까! 자기 왼손으로 남을 도우면서 자기 오른손도 모르게 주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 가 봅니다. 편지 자주 옵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 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이제 예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꽉 끼어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 두어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았어.」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신사가 주소를 보여주었더니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하고 소년이 인도하여 안내해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에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 됩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드디어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했는데 온 미국인은 물론 세계적으로 보급되어서 지금은 우리나라도 소년단 (Boy Scout)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르는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워주고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진리적으로 볼 때 남의 종교를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것은 양심 있는 학자는 모두 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볼 때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제 3자가 참으로 양심적인 면에서 말할 때는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상대가 안 됩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워 같은 사람은 어떻게 평했느냐 하면 예수교와 불교가 싸움을 한다고 가정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두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느니, 절벽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극단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진리로 보면 그러한데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교 사람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예수교 사람 못 따라 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차리는 것이 무슨 자비가 있는가?
참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중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아마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이 승려에겐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예수교 사람을 보면 참으로 봉사활동 많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깔멜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무슨 제비인지 아십니까?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 자나 깨나 양로원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도대상 분담 제비인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하면 내내 고아원, 교도소에 해당하면 내내 교도소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사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합니다. 조금도 안합니다. 1년 내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아무리 남의 종교이지만 잘하는 것은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팔아서 먹고 산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해서 먹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든 말든, 우리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다면 안 되겠지만 아마 99%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계산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 하는 사람들은, 더구나 승려들은 봉사정신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고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남을 돕는 데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대상은 절밖에 있습니다. 불공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불공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방향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가 구태를 벗어버리고 참다운 중흥의 길, 사는 길을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복(福) 빌어주는 이것이 불공 아니고 남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것을 참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부터 자주 불공 이야기해 오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것을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디 자서전에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말이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 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이 상대 아닙니다. 일체중생이 상대입니다. 사람에 한정한다면 너무 범위가 좁지 않습니까? 사람을 돕는 것만이 불공 아닙니다.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불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을 떠 넣으라 하니 나는 굶어죽고?」
인과법칙이란 불교뿐 아니고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인과법칙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선인 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낫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그것이 기억 안날 것입니다. 세세생생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다 기억나겠습니까?
그러나 기억 안 난다고 해도 그 과보의 원인이 있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남을 해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선이냐? 남을 돕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도우면,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 그 선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도로 자기에게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되고남을 해치면 결국에는 나를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도운 그 만큼 내가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 내게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본다고...
농사를 지어도 그렇습니다. 곡식이 밉다고 곡식을 해쳐 보십시오. 누가 먼저 배고픈가, 자기부터 배고프지. 남을 도우면 남이 행복한 동시에 나도 배부르고 남을 해치면 남이 배고픈 동시에 나도 배고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뜨고 못 보겠거든요. 보통 같으면 「아이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어떻게 하여 도망갈까.」 이런 생각이 먼저 날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 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를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내니지옥은 없어지고 자기부터 천당에 먼저 가버렸던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 )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 버린다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면 내 복(福)만을 위해 내 배(腹)만을 위해서 기도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拜)절을 하라고 ! 」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아침에 20분 동안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108배 기도하는 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불공한다고 해도 매일 108배 하는 사람과는 많이 다릅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시작할 때 조건이 나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길 구함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이제 발심하여 108배를 하는데 스스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위해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다 성불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중생에게 가버려라 이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원하옵나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 없는 진법계에 회향 하오며] 예불 참회한 이 공덕이 모두 남에게로 다 가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이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저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중국도 중공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온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일체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법계에 회향하고 모두 남에게 다 가버려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고, 사명이며, 본분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불자들은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해보자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이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축원문]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참으로 좋은 것이 있습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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