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실상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복잡하고 고난의 연속입니다.
좀 살만하면 죽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모질게 고통을 받으며 쪼들리게 사는 사람이 있고, 배운 것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오래도록 다른 이의 신세지기를 쉽게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십니까?
남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편입니까?
누구든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남과 더불어 의지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람사는 모습인데 유난히 자립의지가 강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무슨 일을 시작하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되면 누구나 잘살겠지요.
그러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될 때는 그렇지 못할 때를 생각해서 준비하고 잘못될 때는 다시 점검을 해서 그 고비를 넘어가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또 살다보면 갑자기 변고가 생기거나 액운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변고나 액운도 업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한 천인이 와서 문안을 드리며 여쭈었습니다.
“윤회의 굴레는 왜 생기는 것이며, 그 굴레를 끌고 가는 이가 누구이며, 윤회의 굴레는 얼마나 굴러야 돌지 않고 사라지게 되나이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읊으셨습니다.
“업을 따라 윤회의 굴레는 생기고
마음이 그것을 굴리면서 가노라.
돌고 돌다 그 인연이 다하는 곳에 이르면
생사의 굴레는 돌지 않고 멈추리.”
《별역잡아함경 제 14》
즉 살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일들이 다 전생부터 이어져 온 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업력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생기는 변고가 업력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는 피하지 못하고 받는 것입니다.
석가족을 멸망시키고 세 차례나 쳐들어 오는 코살라국의 유리왕을 막았던 부처님께서는
네 번째 정벌에 나선 군대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목련존자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신통력으로 유리왕과 그 군사를 다른 세계로 던져버릴 수 있나이다.”
“그렇다면 너는 석가족의 전생 인연까지도 다른 세계로 던져 버릴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목련이여, 자리에 돌아가 앉아라.”
“그러나 카필라성을 저 허공에 옮겨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석가족의 전생 인연도 허공에 옮겨 놓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렇지는 못하나이다. 허락하신다면 카필라성을 쇠그물로 덮겠나이다.”
“전생의 인연까지도 쇠그물로 덮을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대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 앉아라. 석가족의 전생 인연이 무르익어 이제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설사 저 허공을 땅으로 만들고
땅을 허공으로 만들 수 있다해도
이미 뿌려놓은 인연의 씨앗은
썩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나니
인연이 무르익는 날에는 반드시 받아야 하리라.”
《증일 아함경 등견품》
그러면 우리가 살면서 변고를 덜 겪고 재앙을 피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을 알더라도 그 방법을 실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는 사람, 자꾸 되는 일이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 그리고 죽어서 극락에 가고 싶은 사람은 지금부터 알려드릴테니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화근을 면하는 방법을 잘 듣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설화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부처님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순유(巡遊)에 올라서 어느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노인이 생선을
팔면서 슬프게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아, 천도님을 알 수가 없구나. 나같은 노인을 홀로 남겨두고, 죄도 없고 과오도 없는 내 아들을 데리고 가셨구나.
그 애가 살아있다면 내가 생선을 파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부처님은 노인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다시 조금 가니까 큰 돼지가 더렵혀진 몸을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태연히 가는 것을 보시더니 또 웃으셨습니다.
아난존자는 이것을 보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들을 보시고 웃으셨는데 무슨 연유로 웃으셨는 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바라옵건대 먼 훗날의 대중의 의념을 씻기위해서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난아 잘 물었다.
내가 웃는 것은 세 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 이다.
첫째는 그 노인의 어리석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함이다.
그 노인은 날마다 물고기를 잡아서 많은 고기의 목숨을 뺏으면서도 조금도 불쌍하다는 마음을 낼 줄을 몰라,
자기의 죄상이 그 아들에게 화근이 되어서 아들이 먼저 죽은 것을 하늘의 일이라고 원망스럽게 부르짖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자가 아니더냐! 이것이 내가 웃은 첫째의 이유이다.
둘째는 옛날 비행황제가 있어서 복덕이 높고, 위세가 몹시 강했으나,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게으른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선만 팔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불상천(不想天)의 사람들은 팔십억 사천만겁이라고 하는 긴 수명을 가지고 있어서, 하늘이라는 존재에 집착해서 하늘의 존재에도 전혀 없는 두 가지 이치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복이 다하면 생선이 되어서 노인의 바구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웃은 둘째, 셋째의 이유이니라.”
“부처님이시여, 세계를 지배하는 비행황제나 그의 복덕이 높은 상천의 사람들도 죄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난아, 화근이라고 하는거나, 복덕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존귀하고, 번영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무정(無情)의 이치를 버리고 은혜를 모든 것에 베풀면, 모든 화근을 면할 수
있으나, 만일 귀한 것을 뽐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도를 행하면 멀지 않아서 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죄나 복을 뒤쫓는 것은 그림자의 형태를 쫓아, 울리는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또한 귀천 고하의 구별도 없는 것이다.
내가 전생에서 청신사(淸信士)로서 불도의 수행을 배우고 있을 때, 한 사람의 이웃이 있었다.
항상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보고도 못본척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점점 더 덕을 쌓아 부처가 되었지만, 이웃 사람은 언제까지나 귀술이나 살생이나 주색에 빠져서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을 당했다.
내 아들도 이웃 사람의 뒤를 이어 삼악도의 고통을 받아 지금은 부정한 것으로 더렵혀진 돼지가 되어서 축생의 슬픔을
안고 있는 것 이다.
이것으로 내가 웃었던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육도집경 제6 》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화근이나 복덕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존귀하고, 번영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무정의 이치를 버리고 은혜를 모든 것에 베풀면 모든 화근을 면할 수 있으나,
만일 귀한 것을 뽐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도를 행하면 멀지 않아서 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뒷날을 생각하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뒷날 고통을 받으면 한탄의 눈물을 흘립니다.
살다보면 행복한 날도 있고 고통스런 날도 있는데, 행복한 날의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고 베풀면 계속 행복을 유지하고 더 큰 기쁨을 얻게 되지만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고 인색한 마음을 쓰면 곧 행복은 깨지고 맙니다.
행복이 깨지는 것, 그것이 바로 화근을 만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화근을 만나면 한탄만 해야 하는가.
한탄하고 있을 시간에 진심으로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다시 선행을 지어 화근을 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모여서 이 설법을 듣는 불자님들은 그나마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화근을 면하고 복을 구할 방법을 아시게 되었으니 이제 생활속에서 실천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근을 면하는 복행을 지을 수 있을까?
뭐니뭐니해도 보시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베사리성의 마하바나 동산에 계실 때 시하라는 장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주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나니,
좋은 이름이 널리 퍼지고,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기쁨을 누리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나느니라.”
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잘 들으시고 보시행이 화근을 면하는 길임을 깨닫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보시는 중생을 위한 복의 그릇이요
진리에 이르는 길이니
누구라도 보시의 공덕을 생각커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라.
보시는 널리 평등하여
본래의 좋은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나니
보시하는 마음에 부처님 뵙고 구제받는 인연 맺으리라.
사람들은 악행도 하고 선행도 하노니,
선과 악은 늘 제 갚음을 받는 법,
자신이 닦은 선악의 과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로다.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는
지금 받는 과보로 알 수 있나니
선행에는 선의 갚음이 따르고
악행에는 반드시 악의 과보 따르느니라.
선행과 악행은 그 사람이 익힌 버릇이니
버릇따라 열매 거두리로다.
즐거움을 보시하면
뭇사람의 사랑과 칭찬이 따르나니
가는 곳마다 두려움 없고
남에게 미움사지 않을 것이네
지혜로운 이의 보시는
온갖 나쁜 생각 떨어 버리고
태어나는 곳곳마다 좋은 곳이라
모든 하늘이 칭찬함이로다
그러므로 진실한 보시를 하는 사람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증일아함경 대애도반열반품》
'향내음의 보금자리 > 일주문(심검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안한 마음 (0) | 2012.08.31 |
---|---|
- 근심을 푸는 곳 -해우소 (0) | 2012.08.21 |
보시하고 계 지키면 큰 힘 생긴다 (0) | 2012.08.17 |
만복이 깃드는 하심(下心) (0) | 2012.08.17 |
본래면목 (0) | 201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