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심(無心)이 부처다 ♣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 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적조, 적광, 정혜등지(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 다 이 말입니다.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직접 밥을 떠 먹어야지요.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
'향내음의 보금자리 > 일주문(심검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다보니 (0) | 2008.04.30 |
---|---|
살다보니 (0) | 2008.04.30 |
자존심을 버려야....... (0) | 2008.04.29 |
관세음보살 정근 (0) | 2008.04.23 |
법을 믿되 사람을 믿지 말라.................() (0) | 2008.04.17 |